청 남사당패
청이 남사당패에 들어간것은 겨우 여덟살 남짓한 나이였으나, 제 또래보다 훨씬 체격이 작은 탓에 겉보기로는 그저 다서,여섯이나 되었거니 싶은 몸을 지니고 있었다. 얇다 못해 빼빼 마른 몸을 발발대며 온갖 신부름을 도맡아 하다가도 청은 저보다 한두살이나 어린 도령이 비단 옷을 차려입고 서당에 가는것을 볼때면 으레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그를 흘기기도 했다. 허나 한눈을 팔면 돌아오는 것은 당장에 뼈를 후려치는 매타작이었으므로 청은 번번히 제 양 뺨을 잡고 그들을 외면하는 것이 일이었다. 연속되는 흉년에 이틀에 한번꼴로 받는 주먹밥으로 겨우 연명해가면서도 삐쩍 말라가는 몸과 달리 키는 멀대처럼 쑥쑥 커져만 갔다. 그의 수동모는 남사당의 꼭두쇠였는데, 그는 청이 열넷이나 되어 키가 육척에 조금 못미치자 그제서야 장구를 치는법이나, 공중제비따위를 가르쳐주었다. 광대놀음에 본격적으로 끼기시작할 즈음에, 꼭두쇠는 거나하게 취한 몸을 비틀거리며 청에게 손짓했다.
아야. 청아.
예.
너도 이제 곧 성인이지 않느냐. 더 이상 어린아이도 아니니, 먹여주고 키워준 밥값을 너도 해야지.
청은 정좌로 꿇고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겄으요.
각시탈을 쓰고서 말기치마를 허리께에 단단히 감아매고 치맛자락을 번번히 들추는것이야 광대놀음에서는 퍽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치마를 들추는것이 한 낮뿐이 아니란것과는 다른얘기였다. 그래도 청은 알겠다고 했다.
그날 밤에 찢어진 살갗 사이로 흐른 피가 속곳은 물론이고 양반네의 귀한 보료에까지 흠뻑 적시고도 남아 청은 제대로 앉는것마저 고통스러워했지만 꼭두쇠는 모른척 청을 연신 침소로 밀어넣었다.
생계를 위함이니 이해하거라. 네가 해우채[解衣債]라도 받아와야 나머지가 먹고 살것 아니냐. 그동안의 은혜가 있지.
꼭두쇠의 뒤에 있는 소품용 낫이 촛불에 덜렁거리며 번뜩번뜩 청의 시야 안을 찔러댔다. 그 시간에 익숙해지는 것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뭐든 빨리 적응해버리는 그의 성격탓인지, 혹은 허울뿐인 가족의 틀 안에 안주하고자 하는 욕심때문이었는지, 청은 꼭두쇠가 줄을 타다 떨어져 비틀린 목으로 장사를 지내게 된 후에도 그 일을 멈추지 않았다. 다른 광대들 역시 당연시 했고, 그의 수동모를 담당하게 된 새로운 가열 역시 그랬다. 청은 침소에 들때면 다소곳하게 꿇어앉아 각시탈을 쓴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닫히며 비단소매가 부드럽게 스치고 옆에 앉았고, 다가올 손길에 청은 한껏 몸에 힘을 주고 있었으나 청을 건드리는 것은 종잇장이 펄럭펄럭 넘어가며 일으키는 바람뿐이었다. 탈 너머로 눈을 슬쩍 뜨고 흘겨보자 겨우, 열 일곱이나 되었을법한 젊은 선비가 매우 시큰둥한 얼굴로 서책을 넘기는것이 아닌가. 청이 몰래 훔쳐보는것을 알기라도 했는지,
편하기 앉지 그러오?
목소리는 어찌나 다과마냥 달콤한지, 떨궈져 나온 조각을 끼워 맞춘 것처럼 밤에 꼭 맞는 목소리였다. 청이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찔이자 그는 잠시 멈추었던 책장을 다시 팔랑팔랑 넘기기 시작했다.
하도 잘 봐달라 사정사정하니 들이긴 했소만 비역질엔 내 동하지 않으니 대충 자고 새벽에 가시오. 식구들은 술상 거하게 차려드렸으니.
....
비역을 출(出)하였을때 삐리는 소리를 내지 않는것이라 배웠으므로 청은 속으로만 이유를 물었다. 이미 자성쪽으로 돌아간 탈의 눈 안으로 노란 눈이 끔벅거리거나 말거나 자성은 서책을 마저 훑어내리고 도포를 풀어 속곳만 입은채로,
편하게 앉으라니까. 난 그만 자야겠으니 불 좀 꺼주겠소? 그리고 그 탈 좀 벗으시오. 없던 귀신도 나오겠네 그래.
그러더니 정말 청에게서 휙 돌아 누워버리는 것을 보며 청은 어찌할 바를 몰라 초를 쳐다봤다가, 자성의 등을 쳐다보며 난감해했다. 한식경(약 30분)이 지난 후에야 창호지 밖으로 새어나오던 불빛이 가느다란 연기와 함께 공기중으로 흩어지고, 청은 탈을 옆에다 조심히 내려놓은채 새벽별이 기울때까지 자성의 등을 내내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로도 이틀이나 더 청은 자성의 침소에 들어야 했다. 자성의 말과 달리 새로운 꼭두쇠는 청의 어깨를 토닥이며
이번에 아주 나리의 마음을 꽉 잡았나보다. 응? 잘했어. 잘했다.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 그리고 오늘은 탈 쓰지 말고 오시라더구나.
하며 웃었다. 탈을 쓰지 않고 덜렁 계집의 옷만 입고 들어가자니 그것만큼 또 부끄러운 일이 없었다. 세 식경이 멀다하고 입는것이 계집옷이라 사내옷보다 더 익숙함에도 어쩐지 그랬다. 문을 열고서 청은 주춤거렸는데, 방 안 가득 어질러지다시피 널려진 종이 위로 그려진, 길게 쭉 쭉 뻗은 난초가 방 안 한가득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자성은 멋쩍은 듯 종이를 한장한장 거두기 시작했고 얼결에 청도 그것을 도왔다.
..오늘은 왜 이리 일찍 왔소? 것보다 난 그쪽이 벙어린줄 알았는데 말요.
청은 고개를 살짝 떨구며 웃었다.
...글쎄요오. 다덜 즈가 말 하는것을 그닥 안좋아허셔서요. 나넌 기냥 박히기만 허믄 되니께.
그 적나라한 말에 자성의 흰 얼굴이 화르륵 불타오르자 청은 의아하게 쳐다보다 제가 더욱 붉어져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녀요. 고것이 아니라 그니께...
청으로서는 실로 오랜만에 해본 말이었다. 일생의 대부분을 같이 보낸 이들보다 더 많고, 다양한 말을 한지라 청은 어느덧 축시(새벽1~3시)를 훨씬 넘긴것도 잊은채, 그 짧은 마지막 밤을 담소로 보냈다. 인시(새벽 3~5시)를 넘겨 하늘이 밝아오는 것이 못내 아쉬운것은 비단 청 뿐만이 아니었는지 자성은 때때로 문 밖으로 시선을 주며 작게 한숨쉬었다.
첫날 결국 잠을 안 주무셨든디요.
알고있었소?
거 둘째날 보니께 알겄드만요.
청, 당신이 내 옆에 와서 자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말요.
나리넌 농담도 잘허시요.
나리라 하지 말래도.
암만 그려도 나가 거 소 말보다 못헌 천민인디 으째 양반님헌티 하대를 헌답니까.
그 치마하고 괴상한 탈만 안쓰면 다들 그런줄도 모른다 하지 않았소.
암만 그려도...
청의 지칠줄 모르는 대꾸에 자성의 처진 눈꼬리가 더욱 내려앉았다.
두손 두발 다 든것은 청이 먼저였고, 자성은 청이 방을 나서기 전에 작은 장신구를 몇가지 손에 쥐어주었다. 동시에 섞여들어간 숨결이 서로의 마음에 홧홧하게 불을 지피고, 아직 찬 새볔이슬에 적셔든 마음은 불꽃만 남겨둔채로 안녕을 고했다. 넓은 조선팔도, 같은 하늘 아래만 있다면 언제든 닿지 않겠냐는 기약없는 약조에도 알겠다고, 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
자성은 유랑단이 찾아오는 날이면 관중무리에 끼어 행여나 그가 있지 않을까 마음을 졸였다. 각시광대를 볼때마다 곰뱅이쇠를 불러다 번번히 이름을 물어보았으나 자성이 찾는 이름은 아니었다. 그렇게 오년이 더 흐를동안 자성은 늦은 혼인을 올렸고, 아이도 둘이나 생겼다. 원해서 한 혼인도 아니었으니 둘째에 아들을 낳고서 부부관계는 당연히도 소원해졌다. 청을 찾다못해 기생집에 들락거리는 날이 집에 들어가는 날보다 많아지며 자성은 횡행하였다. 기생집을 하도 들락이다보니 또한 술친구라 할 수 있는 자 역시 생겼는데, 전주 이씨로 본관은 같았으나 자성은 순평군파의 46대손이고, 그는 화의군파의 48대손으로 본인을 이중구라 소개했다. 엄밀히 보자면야 자성이 그의 대부가 되었으나 권세로 보자면 중구가 압도적으로 우위라고 할 수 있었다. 허나 그는 뭘 그런걸 따지나. 친우 사이에. 하고 술잔을 들었고 자성 역시 술잔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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