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청. 검은머리 짐승은 함부로 거두는 것이 아니다.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뭉뚱그려진 시야에 반짝이는 디지털 시계는 겨우 세시 이분임을 알리고 있었고 옆집은 또 발작처럼 시끄러웠다. 벌써 한두번도 아니었다. 새로 들어서는 오피스텔의 입주가 미뤄져 임시로 마련한 이 빌라는 잊을만하면 이처럼 온 동네를 들썩여놓곤 했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하며 무언가가 벽에 부딪혀 부숴지는 소리, 그리고 나이가 지긋함이 분명할 남자의 고함소리다. 남자 혼자 그러는 것이 아니다. 남자는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있었고 제 분에 못이겨 대답 안해, 대답 안해! 소리치기도 했다. 맞는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이 기절했거나, 혹은 벙어리거나, 혹은 죽었거나. 셋중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일주일에 한번꼴로 저러는 것을 보아 아직까지 죽지는 않은 듯도 싶었다.
하루 종일 피곤함 몸을 이끌고 다녔던 중구로서는 꿀과도 같은 단잠이 박살이 나다못해 산산조각이 나버려 있는대로 짜증이 치밀기 시작했다. 씨팔. 저 개새끼가. 중구는 벽 한쪽에 장식처럼 놓여져 있는 아이언을 집어들었다. 문을 부실듯 열고 나가 당장에라도 옆집 문을 부술듯 두들겨댔다.
이내 곧 안에서 초췌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쇠고리를 걸어놓고 겨우 반뼘만큼만 문을 열고 음침한 얼굴을 내밀뿐이었다. 중구는 우선 아이언을 오른손으로 집어 보이지 않도록 하고 잠깐 얘기좀 합시다. 하고 문 열기를 권했다. 남자는 아니나 다를까 저번처럼 그저 미안하오. 하면 되는 줄 알고 영혼없는 사과를 던졌지만 중구는 코웃음을 쳐댔다. 하, 나 이 씨발. 이보쇼. 내가 여기 이사온게 삼주째요. 삼주 내내 한번도 안거르고 뭐하자는거요? 다음주에도 또 지랄하시려고? 닥치고 문. 열어.
남자는 안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문을 도로 닫으려 했다. 간발의 차로 밑애 제 신발을 끼운 중구와 눈이 마주치고 중구의 손이 문을 잡았다. 어허. 이러면 쓰나. 사람이 얘기좀 하자는데. 마치 마술의 어떤 트릭처럼 문걸이가 뜯겨져 나가고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걸쇠가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활짝 열려진 문 밖으로 보이는 중구는 비틀린 미소를 지었고, 손에는 아이언이 들려져 있었다. 그것을 홰홰 돌려 제 어깨에 걸친 중구가 신발도 벗지 않은채로 성큼 걸어들어오자 남자는 저도 모르게 물러나며 기함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중구는 안으로 들어서며 아주 당연하게 아이언을 휘둘렀다. 남자의 머리 바로 위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고 남자는 벽에 붙어 떨어댔다. 밑으로 축축하게 젖는것이 찌린내를 풍겼다. 찍소리라도 내봐. 어디. 다음은 댁 머리통이우. 집안은 정말 눈뜨고 봐줄수 없을정도로 더러웠다. 씨팔 어쩐지 옆집이 이러니 우리집까지 벌레가 꼬이지. 이게 집이요? 우리지 씨발. 발에 채이는 쓰레기를 걷어차며 주방 안쪽으로 들어갔을땐 점점이 떨어진 핏자국이 중구의 시선을 따라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앙상한 발목. 그 위를 뱀이 기어가듯 기괴한 곡선을 그린 핏줄기.
싱크대에 상체만 엎드려 눕힌채 양 손은 선반에 쇠사슬로 묶여있는 남자가 있었다. 살갗과 함께 찢어진 옷들이 피로 얼룩져있었고, 그 원인은 분명 그의 얼굴 바로 옆에 꽂혀있는 식칼일 것이었다. 너덜너덜한 상의, 아니 누더기만 걸친채로 치부를 훤히 드러내고 있는 그 남자는 이미 기절해 있었다. 가까이 가니 척 보기에도 이미 머리를 여러차례 싱크대에 찧이고 무언가로 얻어맞아 터진곳이 한두군데가 아니었고 엉덩이 밑으로는 여전히 피가 계곡물줄기마냥 흐르고 있었다. 하, 나 이 더러운 새끼.. 다시 현관으로 갔을때 이미 그 남자는 도망가고 없었다. 중구는 욕을 짓껄이다가, 이대로는 사람 죽였단 덤태기나 딱 쓰기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몸을 움직였다. 얼기설기 감아만 놓은 쇠사슬을 풀자 남자가 그대로 미끄러지려는것을 용케 잡아 올렸다. 이름도 몰라 신분증도 없어 깨어나지도 않아, 중구는 미칠지경이었다. 이대로는 병원에 데려가봤자 접수도 못할것이 뻔할 뻔자였다. 씨발씨발 욕을 짓껄이면서도 중구는 재개 손을 놀렸다.
* 회사에서 돌아왔을때 청은 방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정확히는 엉덩이를 질질 끌며 기어가닌다는 표현이 맞았지만. 청은 중구를, 중구는 청을 서로 멍청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중구였다. 너 이름이 뭐냐? 청은 대답하지 않는다. 중구는 청이 일어서거나 말하는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동안 벙어리라서 비명한번 안지른거라는 가설을 중구는 확신했다. 하지만 중구가 집을 나서 회사를 갈때면 청은 멀쩡하게 두 다리로 서서 집안을 활보했고, 말 역시 못하지 않았다.
정청. 받아. 막 돌아온 중구가 청에게 던진건 아이스크림이었다. 바닥에 깔린 러그 위에 앉아 벽에 기대있던 청은 화들짝 놀라 그것을 받고는 의아하게 쳐다봤다. 더워서 사왔으니 먹으라고. 싫으면 내놔. 날름 봉지를 뜯는 청을 보며 중구는 흥, 콧김을 뿜었다. 청은 처음부터 중구를 무서워하거나 싫어하는 기색은 없었으므로 중구는 한시름 덜긴 했다. 말은 안해도 펜과 종이를 쥐어주면 묻는말에 곧장 잘 대답하곤 했으나, 청은 유독 그 때 그 남자에 대해 말하길 꺼려했다.
꽤 늙은 아저씨였는데. 뭐..아버지냐? 청은 묵묵부답이다.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며 아예 다른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리기까지 했다. 아니면 네 약점이라도 쥐었어, 그 놈이? 청은 고개를 저었다. 그와 관련된 질문중에서는 가장 처음으로 답한 것이다.중구는 외려 제가 놀라 펄쩍 뛴다. 근데도 가만히 당한거라고, 이렇게 따질 수 없는건 청이 앉은뱅이요 목소리도 못내는 불쌍함 남자기 때문이었다. 청은 더 이상 중구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둘이 산것도 벌써 보름이었다. 중구가 청을 붙들고 앉았다. 어이, 내가 원래 살기로 한 곳에 가게 됐거든? 어차피 임시로 머물렀던 집이니까... 여기 곧 내놓을건데. 어쩔거냐. 청은 뭘 묻냐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아마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보건대 청은 당장 중구가 나가라고 해도 그렇게 했으면 했지 제 의견을 말하진 않을 것 같았다. 밖에서 지는 석양에 노랗게 달아오른 눈이 중구를 주시하고만 있다. 중구는 속이 터진다. 씨발, 어쩔거냐고! 청은 고개를 떨군다. 미약하게 고개를 젓는 모습을 보며 중구는 속이 시원하면서도 찝찝한 얼굴이다. 대답을 들었으니 됐다고 중구는 현관을 나서버렸다. 한시간. 두시간. 조용한 집에 시침만이 소란이다. 새벽별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숨기를 백번쯤 반복했을때 중구는 집에 들어왔다. 덥게 내쉬는 입김에 알콜이 잔뜩 섞여 내려앉았다. 청은 그때까지도 자지 않고 있었다. 중구는 코웃음을 쳤다. 왜 아직도 안자냐. 너. 청은 고개를 젓는다. 너. 내가 같이 가자면 갈거냐, 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왜? 이유를 물으면 돌아오는 답은 없다. 내가 혼자가면, 너 갈데는 있고? 청은 벽을 가리킨다. 옆집이다. 또 그 더러운 곳으로 들어간다고? 중구가 청을 데려오고나서 그 남자는 다음날 옆집에 잠깐 들렀을뿐, 그 뒤로는 보이지 않았다.
중구는 머리를 싸맨다. 얼얼하게 올라오는 술기운이 머릿속을 휘몰아치고 그 중심에는 청. 정청. 두 글자가 웅크린듯 잠들어있다. 소파에 앉은 중구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청이 다리사이로 파고들었다. 얼굴을 쓸어내리던 중구는 의아한 얼굴로 청을 바라보다가, 청이 제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묻자 놀라 머리통을 밀어냈다. 뭐, 하냐. 너? 청이 중구의 손을 잡아 뗐다. 여태껏 직접적으로 중구에게 손을 댄 적이 없었던 청인지라 중구는 다시금 얼굴을 파묻는 청을 말리지 못했다. 바지 위로 우물거리다 버클마저 풀고 말캉한 혀가 감싸자 중구의 입에서 억누른 신음이 간신히 흘러나왔다. 청의 멱살을 잡아 확 끌어올리자 먹은것도 적어 가벼운 몸이 속절없이 끌려온다. 금방이라도 물어뜯을듯 입술부터 집어삼킨 중구가 청을 바로 눕혔다. 휘몰아치던것이 곧 커다란 토네이도가 되어 온갖 잡념을 날려버렸다. 별이 다시 잠들고나서야, 중구는 상쾌함을 느꼈다.
* 중구는 결국 청을 끌고 새 오피스텔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중구는 청이 걸어다닐 수 있다는 사실과, 또 여태 일부러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나넌 못헌다고는 안혔는디. 그의 말대로 중구가 제 멋대로 생각 한 것이지 속인 것은 아니었다. 어느 새 새 집을 제 집마냥 활보하고 다니는 청의 모습에 중구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기실 이쯤되면 그가 그동안 자신을 속였는가 속이지 않았는가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새 집에 새 가구, 새 가족-과연 가족이라 칭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지만.-이 생겼으니 중구는 우선 새 가구부터 테스트 하기로 했다. 침대 위로 장정 두명이 배려없이 몸을 던져도 끽 소리 한번 나지 않는걸 보니 확실히 침대는 좋긴 좋은가보다며 청은 능청을 떨었고 중구는 확실히 써봐야 알지 섣불리 판단할게 아니라며 곧장 청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