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님 생일.
열두시 땡 하자마자 드렸던 그것.. 청자든 자청이든 둘이 잘되면 나야좋다..
..형님. 아 혀엉..
그 좆같이 생긴 얼굴을, 지은 죄가 있다고 차마 펑펑 울지도 못하고 마는 그 얼굴에서 고개를 돌렸다. 이만 가라고, 다 꺼져가는 이 생명을 너에 대한 배신감과 함께 태워보낼테니 그만 가라. 눈물 대신에 긴 숨이 흘러내렸다.
*
눈을 떴다. 어떻게?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마 위로 긴 한숨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형님. 정신이 드십니까? 내려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올려다보는 듯한 재헌의 눈에 울망울망 눈물이 찼다. 으메 씨벌 깜짝이야. 느 뭣허냐? 몸을 번쩍 일으키자 정수리에 마른번개라도 내리친듯 강렬한 충격이 머릿속을 쾅쾅 울렸다. 저도 모르게 머리를 감싸쥔 손에는 무거운 링거줄이 대롱대롱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재헌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무슨 꿈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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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로. 영양부족. 사고로 인한 정신적 충격.
흰 가운은 사고 이틀 뒤에야 겨우 뜬 눈 앞에 환한 후레시를 비췄다가,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가, 차트에 알 수 없는 꼬부랑 글자들을 마구 휘갈긴다. 잠 꼬박꼬박 잘 주무시고, 식사 제때 하시고, 당분간 안정 취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의사는 대충, 누구나 한번쯤은 들었을 법한 처방을 읊곤 자리를 떴다. 그래서, 그 부딪힌 사람은? 가벼운 뇌진탕이랍니다. 뒤져봐도 아무것도 없는게, 화교출신이라는 것 외에는 평범한 사람이였습니다. 재헌이 내민 서류철에 그의 신상명세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이자성. 전라남도 여수시 학동 483-2. 부. 이인철. 사망. 모. 송선자. 사망. 무선국민학교. 여천 중학교. 양평 고등학교. 그 외 기타 인적사항 없음. 사진은 고등학교 때 찍은 것이 마지막인듯, 무표정의 교복차림 사진 한장만이 달랑달랑 매달려 있었다. 이상하다. 이상해? 뭐가 이상하지? 청은 스스로 중얼인 것에 의구심을 품었다. 태어나 처음 보는 사람임이 분명한데, 낯익은 얼굴이다. 그러다 흐흐 저도 모르게 웃는 것이다. 이 정청이가, 궁금한 것을 왜 이라고 천치마냥 가만히 앉아서 고민을 하고있단 말인가? 당장에 자성이 누워있는 병실로 달려갔다.
자성은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넘어지며 부딪힌 뒤통수가 깨져 머리에 둘둘 붕대를 감고 있었고 팔뚝에는 청과 같은 자리에 링거바늘이 꽂혀져 있었다. 아. 또 다시 머리통이 지끈지끈거린다. 청은 인상을 찌푸리며 잠시 휘청였고 재헌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뒤에서 잡았다. 청은 가만히 자성을 내려다보다가, 의자에 앉아 그 얼굴을 내도록 바라만 봤다. 마치 아이들 숨바꼭질처럼 머리카락만 빼꼼히 보일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뭔가가 머릿속 한가운데 들어앉아있는 기분이었다.
어릴적 헤어진 가족이라도 되나. 아니, 그건 아닌데. 화교출신이라니 중국에서 오다가다 마주치기라도 했을까. 아니, 그것 역시 아니다. 이 남자의 해외거주 여부는 전혀 없었다. 그 작고 좁은 여숫바닥에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세상에 나왔을 것이고, 또 그 곳에서 나이 스물이 되도록 붙박혀 살았음이 분명했다.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자성의 뺨을 톡 찔렀다. 아, 형님. 좀! 하고 짜증을 내는 것이 눈에 선해 청은 푸스스 웃었다가 바보처럼 으엉? 하는 소리를 입 밖에 내었다. 아니, 언제 봤다고 형님이래? 어떻게 그 짜증내는 얼굴마저도 이렇게 눈에 선하고? 청의 손이 자성의 뺨을 감싼다. 가장 이상한 것은, 자성이 끄응 거리는 소리와 함께 청의 손에 뺨을 부비듯 기댔을때 넘치는 것이 당황스러움이 아니라, 제 무릎을 적시고 있는 눈물이라는 것이었다.
으띃게 이리 또 만났냐. 평생 모르고 살으라고 내 옆에 나타나지 않은 것 아니었느냐. 성아. 불쌍한 내 새끼.
자성. 이자성. 어떻게 그 이름을 모르고 그동안 산다고 살았을까. 이번엔 배신하지 않겠노라 그 먼 먼 길을 돌아 결국 이 안으로 들어왔단 말이냐. 그 때 흘리지 못한 눈물이 이제서야, 겨우 돌아왔다.
*
자성이 깬 것은 그로부터 약 여섯시간 후 쯤이었다. 청은 자성의 침대에 상체만 엎드려 잠들어있었고, 자성은 깨진 머리통에 한동안 천장의 격자무늬만 뚫어져라 노려봤다. 흐렸다가 선명해졌다가 제멋대로 왔다갔다 하는 시력은 눈을 몇번이나 깜박이고 나서야 겨우 돌아왔다. 오른손이 하도 답답해 뭔가 하고 내려다 봤더니 익숙한 뽀글머리가 제 옆에 잠들어있다. 자성은 저도 모르게 그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화들짝 놀랐다. 속으로 물음을 던지기도 전에 청이 부스스 일어나 입가의 침을 닦는다. ..어떻게? 어떻게 날 찾은거요? 어떻게 당신이 내 앞에 있는거요? 어떻게.
..어떻게..
하고싶은 말은 많았다. 그러나 저를 기억한다 보장 할 수 없는 자성은, 제 복잡한 마음을 차마 표현하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청이 멋쩍게 웃는다. 고것이, 새벽에 내 차랑 댁이랑 부딪혔다 안허요. 이틀 내리 꼬박 잤소. 머리통이 좀 깨졌다든디. 괜찮어요? 듣고보니 그랬던 것도 같다. 하지만 어떻게 하필 부딪힌 차의 주인이 당신이야? 어떻게든 마주치지 않으려고, 이번엔 배신하고싶지 않아서 그렇게 숨어다녔는데. 어떻게. 자성의 표정이 침통해지자 청이 놀라 호들갑을 떤다.
그, 병원비는 나가 다 낸께 걱정 말어요. 잉. 다 나을때꺼정 편히 쉬시오. 편히. 난중에라도 아프믄 언제던...
..아뇨, 난.. ...아뇨. ....괜찮..소.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입은 채 다물지도, 그렇다고 더 이상의 말도 잇지 못하고 자성은 그만 고개를 숙였다. ..그래야 네가 살어.. 귓가에 속삭이듯 그의 꺼지는 목소리가 선명하다. 너 만에 하나… 천만분의 하나라도. 당장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거친 숨소리에, 빛을 잃어가던 호박색 눈동자. ..너. 나 감당할 수 있겄냐. 아. 당장에라도 나락에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당신을 잃고, 다시 여수로 돌아와, 십년, 이십년, 삼십년을 그런 기분으로 살아왔는데 아직도 더 떨어질 곳이 남아 있었다. 아직도.
*
자성은 손에 쥔 캔커피를 만지작거렸다. 형님이 있었소. 정말, ..정말. 친가족도 아닌 나를 목숨처럼 아껴주던 사람이었소. 그런 사람이었는데.. 고해소에서 신부에게 저의 죄를 고해바치는 죽어가는 사람처럼 그의 목소리에 괴로움이 묻어났다. …죽였소. 내가. 내가 죽였어요. 내가 그 사람 심장에 비수를 꽂아버렸소. 내가, 내가 다 했어..! 목구멍까지 차오른 심장을 토해내듯 말한 자성은 금방이라도 죽을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손 안에서 우겨져 머리 위로 울컥울컥 액체를 뱉어내는 것이 캔커피인지, 아니면 금방 뱉어낸 제 심장인지 자성은 알 길이 없었다. 그 사람이 나를 경멸할까봐, 나를 버릴까봐..! 내가, 내가 죽였어요..
설령 꿈에라도 나올까 잠을 자느니 차라리 서류에 파묻혀 코피를 흘리고, 그에게 사죄하기 위해 무덤을 찾느니 차라리 프락치들을 제 손으로 직접 난도질했다. 당신이 살려준 목숨 차마 스스로 끊지도 못해 죽느니만 못하는 삶을 언제까지 이어가야 할지도 모른채 방황만 했다. 자성은 그의 죽음 이후로 단 한번도 울지 못했다.
*
끈적이는 커피가 자성의 환자복을 까맣게 적셨다. 갈색이라기보단 썩은 핏빛에 가까운 그것은 노을이 져 더 까맣게 보이는지도 몰랐다. 자성은 캔커피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다가 벌떡 일어섰다.
..미안..합니다.
그것이 형님께 고해바치고 싶었던 사과였는지, 지금 보인 추태에 대한 사과였는지는 자성조차도 헷갈렸다. 그래도 그 말을 했으니 이제 되었다고 자성은 스스로 자위했다. 그리고 자성은 다시 이대로 사라져 그의 눈에 보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한걸음. 이보쇼. 청의 부름이 들려왔지만 자성은 무시했다.
두걸음. 아야. 익숙한 부름이 들려왔지만 자성은 무시했다.
세걸음. 이자성. 그의 이름이 들려왔지만 자성은 무시했다.
네걸음. 자성아. 다리가 덜덜 흔들렸지만 자성은 무시했다.
다섯걸음. 부라더.
금방이라도 주저앉아 울 듯한 그 얼굴로, 자성은 돌아봤다.
..표정 풀어, 이 씨빠. 누가 잡아먹냐. 평소처럼 저를 반갑게 맞이하던 얼굴로, 아. 당신은 같은 말을 한다. 다신 못볼 줄 알았는데, 존내 반갑다잉. 귓가까지 입을 주욱 찢고 웃는 그의 눈이 석양에 비춰 노랗게 빛났다. 어이 부라더. 느 많이 힘들어 뵌다. 청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자성의 코 앞까지 성큼 다가온다. 자성은 여전히 물러날수도, 눈을 감을 수도 없이 청의 그 눈을 마주해야만 했다. 독허게 살으랬더니, 궁상맞게 뭣허는거여. 빙신같은 섀끼. 자성의 볼을 톡톡 두어번 도닥이고는 그런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청의 모든 것이 자성은 다 괜찮다고 말하는것 같았다. 형. 쥐어짜내듯 겨우 내뱉은 외마디는 청이 바로 알아들었다. 그랴. 느 형이다 이 씨벨럼아. 느가 감히 나를 모른척을 혀? 머리를 꽁 쥐어박자 자성은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깜박깜박 청을 쳐다보더니 이내 웃는다. 어이없다는 듯 끊어져 나오는 웃음에 올라갔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며 점점 내려간다.
어떻게 당신이 날 용서할 수 있냐고 어떻게 날 다시 브라더라 부를 수 있냐고 자성은 눈물로 물었다. 청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자성의 뒷목을 끌어당겨 제 품에 가두고 등을 가볍게 도닥인다. 자성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청의 팔을 붙잡고 그에게 기대 못 다한 서러움을 잔뜩 토해냈다. 오야. 오야. 괜찮다. 괜찮어. 청은 가슴팍이 다 젖어가도록 제 품을 내어준채로 자성을 놓지않았다. 지평선 끝에 아스라히 걸쳐있던 태양 역시 그제서야 안심한 듯, 내일을 기약했다.
선님 드리자마자 퍽ㅋ발ㅋ한 대자연 으에아아아아 로딘이살려